영상자막
1부
군사용 성이라 하기 지나칠 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된 건축. 39만평의 대지 위에 선 조선의 명품건축 수원 화성(한박자 쉬고)하지만 이 명작의 탄생기간은 불과 ‘2년 반’이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거대한 공간이 조선시대, 그것도 2년 반이란 시간 안에 완공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 (타이틀 마저보고)
(보다가)왕의 아버지는 뒤주에서 죽었다. 그 사무치는 한을 달래기 위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겼다 정조는 아버지가 묻힌 땅이자삼남의 길목에 놓인 고을 수원을국왕 직속 상업도시로 만들고자 한다. 정조에게 새롭게 건설되는 도시 화성은 효심의 상징이자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초석이었다.
5.7킬로미터에 달하는 수원화성의 성벽. 성벽에는 네 개의 성문과 다섯 개의 암문. 치성과 포루등 100미터마다 다양한 방어시설들이 계획되었다.1794년에 정월에 시작된 공사의 목표기간은 10년. 하지만 모든 공사가 끝난 것은 2년 반 뒤인 1796년 10월이었다. 그 기간 동안 화성에서는 파격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좀보다가) 그 놀라운 순간들이 담겨져 있는 기록,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의 계획부터 완공의 순간까지 성역의 모든 과정과 순서가 빠트림 없이 남아 있다. (보다가) 축성의 첫 단계는 자재확보였다. 본래 나라의 큰 공사가 있을 때마다 모든 자재를 마련화강암 타이트 7초하는 일은 백성의 몫이었고 이는 긴 시간을 필요로했다.이에 화성에서는 필요한 석재의 종류를 나누고 치수를 정했다.
그리고 규격에 맞는 돌을 가져오는 자에겐 값을 치러주었다. 백성의 부담이기만했던 자재확보가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바뀌었다.
(좀보다가)파격적인 자재조달방법은 석재만이 아니었다기둥이나 대들보와 같은 거대한 목재는 충남 안면도나 강원도 국유림의 나무를 사용했다.하지만 기둥과 달리 서까래용 가는 나무는 다른 방법으로 충당했다. 바로 민간목재상을 이용한 것이다. 상인들끼리 경쟁이 붙자, 오히려 목재의 품질이좋아지기 시작했다. 신속한 자재조달부터 고품질의 물량 확보까지, 새로운 방법의 채택은 대성공이었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시도들은 계속되었다.
18세기 화성은 실학의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다산 정약용과 명재상 채제공이 화성축조에 투입, 자신들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특히 실학을 연구해 얻어낸 건축공법의 투입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절감을 불러왔다. (보다가)다산이 고안한 장비 거중기. 화성성역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거중기는40근의 힘으로 그의 625배인 2만천근의 무게를들어낼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인력을 모아야 가능했던일들이 기계의 힘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보고)거중기 외에도 각양각색 다양한 도구들이 투입되어 일손을 줄이는데 큰 몫을 해냈다. 물레와 도르레를 이용해 만들어낸 녹로,자재의 이동을 쉽게 한 별평거 등 추성에 동원된 기구는 모두 10종류.이처럼 조선후기 정신사의 한 획을 그은 실학은 화성에서 건축과 결합해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거대한 국가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팔도 장인들도 화성에 총집합 했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직종에 따른 장인들의 출신지역을 밝혀놓고 있다. (마저보고) 자막) 지방석수 강화부 17명 개성부 42명 경기부 9명 충청도 11명 강원도 3명 황해도 15명 전라도 2명 평안도 1명 출신지역만이 아니라, 한 장인이 얼마동안공사에 투입됐는지도 기록돼 있다.
날짜에 따른 노임이 지급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부역의 일부로 취급됐던 성역사업, 직공별 임금 기록 의궤 7초여기에 일당을 지급한 것은 혁명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파격적인 조처였다. 직공별 임금지급 기록 (제목)석수 쌀 6승 4전 5푼 / 야장 8전9푼 / 목수 니장 조각장 기칠장 등 전 4전 2푼 / 와벽장 잡상장 쌀 3승 2전 또한 정조는 장인들을 위한 연회를 자주 열었는데 고되게 일하는 장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군주가 있었기에 장인들은 신명을 쏟으며 일할 수 있었다.
(보다가) 지금도 화성 곳곳에 남은 장인들의 이름은 백성을 생각했던 지극한 왕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마저보고)10년을 2년 반으로!수원 화성의 경이적인 공기단축은 백성을 사랑했던 군주와 그 뜻을 같이했던실학자, 장인들이 일궈낸 기적이었다.
2부
둥근 성벽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건축은 없었다. 조선 건축사의 독보적인 존재, 수원화성. 다양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 단단한 위용. 이 모든 것은 벽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타이틀 마저보고) (좀 보다가) 파발이 떴다화성 성역소에서는 벽돌을 구울 줄 아는 장인을 찾기 위해 함경도까지 수소문을 하는 중이었다.
한양에는 벽돌을 구울 줄 아는 좋은 장인이 거의 없으니 함경도에 재주있는 벽돌장 중 가장 뛰어난 자를 골라 화성부 공사장에 보내라(보다가) 공문까지 띄우면서 그토록 유능한 목말라한 까닭은 무엇일까? (좀 보다가)원형과 곡선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표현된 건축물. 화성의 벽돌은 목재, 석재와 혼용돼 일찍이 조선에 없었던 다양한 건물의 형태를 창조했다. (쉬고) 벽돌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자형의 벽돌이 쓰였던 것은 아니다.
(뜨는거 좀 보다가) 화성 축성에는 총 일곱 가지 모양의 벽돌이 쓰였다. 이러한 벽돌들은 다양한 조합을 통해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공간을 탄생시켰다.
(보다가) 각도를 달리하면서 촘촘히 쌓인 벽돌은아름다운 원형의 벽을 이루었고 높이에 따라 차곡이 쌓인 벽돌은 계단을 만들었다. 벽돌 사이로 난 구멍은 적을 노리는 총구가 되기도했다. 이처럼 벽돌을 대대적으로 사용한 건물은 조선역사에서 수원 화성이 유일했다. 이전까지 건축의 주재료는 돌과 나무, 흙이었다. 하지만 중국을 보고 온 실학자들은 화포나 물에 취약했던 우리 건축의 문제점을 간파하고벽돌 사용을 제안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벽돌은 친숙한 재료가 아니었다.이에 화성성역소에서는 벽돌제작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식 가마를 모방해 만들고, 진흙의 상태, 가마의 모양과 온도 등 좋은 벽돌을 위한연구를 끊임없이 진행했다.
함경도의 숙련된 벽돌 장인들을 불렀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화성에서 서울을 향하고 있는 대문, 장안문.장안문의 정문 앞에는 마치 담을 둘러놓은 듯한 둥근 성벽이 가로막고 있다. ‘옹성’이다.옹성은 병자호란 이후 공격에 가장 취약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생긴 방어시설이다.
옹성이 있을 경우,성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쉽지 않고, 옹성 안으로 적이 들어온다고 해도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으므로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 할 수있다. 이같은 구조는 석재보다 크기는 작지만 견고한 벽을 구성할 수 있는 벽돌이 있기에 가능했다. (보다가)화성의 동쪽에 위치한 봉돈. 화성행궁에서 가장 정면에서 바로 보이는 봉돈은평소에는 주변을 정찰하고 비상시에는 연기를 통해 신호를 보내는 통신기구다.
국내 최초 벽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굴뚝 봉돈은 건물 전체를 벽돌만을 사용해 완성했다. 이것은 벽돌을 가지봉돈 양감 4초고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한 박자 쉬고) 공심돈은 조선시대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시설이다.벽돌로 쌓은 망루위에 누각을 올려 군사들을 머물게 했고, 각 층마다 밖을 살피며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놓았다.(쉬고)특히 원형의 동북공심돈은 성벽을 따라 계단이 둥글게 나있었는데 이는 벽돌이 만들어 낸 디자인의 완성체였다. 다양한 모양의 벽돌이 있었기에 벽면에는 총안이나 개구부를 세심하게 설치할 수 있었다.
공심돈이 완공된 것은 화성공사 막바지 1796년 여름의일이었다. 벽돌장이들은 공사 마지막에 벽돌건축의백미라 하는 공심돈과 봉돈을 완성해 낸 것이다. 200여년 햇빛과 비바람에 씻긴 화성의 벽돌들은 아직도 단아하고 고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이전까지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화성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들. 성벽따라 동북공심돈 그곳에는 벽돌이라는 새로운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건축의 문을 연 조선의 도전이 담겨 있다.
3부
(한박자쉬고)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다양한 건물들. 공격과 방어를 위한 건축으로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성. 하지만 군사용 건축인 수원화성을 이토록 아름답게 짓는 것에 대해 신하들의 반발은 거셌다.
자막) “이 무지몽매한 자들아, 아름다움이 곧 적을 이기느니라” 일설에 의하면 정조는 이 한마디로 신하들의 반발을잠재웠다고 한다.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강인함을수원 화성에서 만나본다.
18세기 르네상스 건축의 정점이자 완성작인 수원화성. 총 면적 39만여 평에 달하는 성내 모두가 빼어난 명승지이지만 그중에서 단연 최고로 꼽히는 것은성곽 북쪽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놓인 용연 부근이다.
광교산에서 흘러온 냇물은 용의 형상을 한 바위 아래연못을 이루었고 바위 위로는 각루가 놓여 있다. 본래 각루란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누각을 뜻한다. 하지만 이 각루에는 독특한 이름이 남았다.
버드나무 사이로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이름, 방화수류정. (마저보고) 비록 적의 동태를 살피는 누각이지만 방화수류정은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정자로 지어졌다.목재와 석재, 벽돌이 한데 어울어져 단아한 문양의 벽체를 만들었고, 벽체 위로 정자가 선 곳은 수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방화수류정에는 각루의 역할 뿐만이 아니라 최고급 휴양시설의 역할도 주어져 있었다. (마저보고)방화수류정 서편에는 수문인 화홍문이 자리하고있다.
광교산에서 흘러온 대천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곳에일곱 개의 홍예를 틀어 수문을 냈고 돌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누각을 세웠다. 누각의 이름이 ‘화성의 무지개’란 뜻의 ‘화홍문’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화홍문은 단순한 ‘수문’만은 아니었다.물길이 지나는 곳에 선 수문. 그 위로 누각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누각을 단순히 주변경치를 즐기기 위 한 놀이시설로 보아서는 안된다.
화성에 세워진 모든 시설들은 단지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는 아름다운 누각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유사시에는 적과 맞서야하는 성곽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화홍문은 그러한 두 가지 역할을 잘 소화해내는 건축이었다.특히 마루 아래 놓인 날렵한 살창은 전쟁시 조선군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적들의 동태를 살폈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화성을 가로지르는 대천의 물길은 놓아주지만 비상시에는 단 한명의 적군도 통과시키지 않는 철의 옹성이 바로 화홍문이었다. (쉬고) 빼어난 절경 속 활짝 핀 꽃과 같은 정자, 방화수류정 역시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었다.
정자 아래에는 적들을 공격하기 위한 진지가 마련돼있다
(보고)겉에서 보기엔 벽면 장식에 지나지 않았던 문양은 적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공격을 가하는 군사시설이었다. 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노리기 위해 총구의 모양을 다르게 내기도 했다. 멀리 있는 적을 노리는 원총안과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노리는 근총안. 총구의 다양한 모양 덕분에 자유로운 사격이 가능해졌다. (마저보고)수려한 자태 속에 이토록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음을 그 누가 상상했을까?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강인함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화성이 완공된 다음해인 1797년 정월.정조는 아버지의 묘인 현륭원 방문을 마친 후 방화수류정에 와서 활쏘기를 하였다.
이 날 과녁을 세 번 맞힌 왕은 친히 주변 경치를노래하는 시를 지었다. (마저보고)자막) 봄날 성을 두루 돌아도 해는 아직 지지 않고 歷遍春城日未斜방화수류정의 구름 낀 경치 더욱 맑고 아름답구나 小亭雲物轉晴佳 수레를 세워 놓고 세 번 쏘기가 묘하니 ??貫報參連妙 세발 명중 (6초) 만 그루 버드나무 그림자 속에 화살은 꽃과 같네 萬柳陰中簇似花 "에필로그 두가지 아름다움이 천연히 빛나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해지는 방화수류정 20초 성이 아름다운 것은 지켜야할 백성과 군주가 있기때문이다.
화성의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에는건축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백성과 군주를 지키는 강인함의 미학이 공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