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영상

닫기
동영상 재생하기
영상자막
- 청주 어디서든지 보이던 용두사지철당간 청주의시가지와무심천에서멀지않은곳에용두사지철당간이우뚝서있습니다. 지금은높은건물들에둘러싸여있어조금멀리에서는철당간의모습을볼수없지만, 이곳에시가지가형성되기이전, 철당간이세워질고려시대, 무심천변에논밭이넓게펼쳐져있던그시절에는청주읍성안어디에서건용두사지철당간을볼수있었고 그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청주는‘땅이넓고기름지며사람중에호걸이많고, 그민요와풍속의문명이동남쪽의으뜸’이라하여예부터살기좋은곳이라하였습니다. 청주의땅이기름진데한몫하는것이바로청주의젖줄, 무심천입니다. 무심천은청원군낭성면추정리와가덕면한계리, 내암리일대에서물줄기가시작되어남서쪽으로흐르다가가덕면서부에서북서쪽으로방향을바꿉니다.곧청주시가지중심부를지나까치내에서금강의지류인미호천과합류합니다.

고려시대에이르러서비로소청주라는이름으로불리기시작하는데청주에는또다른명칭이있습니다. 바로 주성(舟城)입니다. 청주의젖줄인무심천은이곳을기름지게도하지만풍수상망망대해를만들어청주를외롭게항해하는배로만들었던것입니다. 그래서사람들은점술가의말대로돛대구실의할당간을세웠고, 청주읍성어디서든지볼수있을정도로높은당간을세워놓은이후에는홍수가나지않았습니다. 철당간은위용스러운모습으로청주읍성을내려다보았고사람들은항상철당간을바라보며평안을얻었습니다. 그때부터청주는배주(舟) 자를써서, 주성(舟城)이라불렀습니다. 옛날청주사람들이얼마나철당간을귀히여기고의미를부여했는지알수있는대목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용두사지 철당간 자체에 기록되어 있는데 당간의 아래에서 세번째 철통 둘레에 393자 가량의 해서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청주의호족인김예종이라는사람이유행병에걸리자철당을바쳐절을장엄할것을맹세하고사촌형인희일등과함께철통 30단을주조하여높이 60척의철당을세우게했다.준풍(峻豊) 3년, 임술 3월 29일에조성하다. 기 기록에 따르면 962년(고려 광종 13) 용두사지철당간을 세운 것이 분명하며 김예종이라는 인물이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바친 것입니다.

청주의도심인남문로2가에세운용두사지철당간은청주라는배가평화롭게항해할수있도록해주는돛대이자행운을비는철당으로서오늘날까지전해져 내려옵니다.

- 용두사 앞에서 깃발을 휘날리던 철당간의 옛 모습 당간은당을다는장대이고당이란절의입구나법당앞에내다거는일종의깃발로서부처와보살의위덕을나타내고,‘부처가모든번뇌를타파했다’는것을상징하는일종의장엄구입니다.

또용두사지철당간이서있는청주시상당구남문로는예전에용두사라는절이자리잡고있던곳입니다. 용두사는고려광종시기에창건되었으나고려말의잦은전쟁과난으로인해폐허가되었고, 지금절이있던터는청주시내의가장번화한거리로변하였습니다.

절은사라졌지만철당간은여전히남아서그시절절과철당간의위용을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당간은밑받침돌과이를버티고있는두기둥이온전히남아예전의모습을잘간직하고있습니다. 철당간은원래 30개의철통으로구성되어있었으나 흥선대원군시절경복궁중건에쓰느라철당간의철통 10개를헐어가지금은 20개가남았다고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