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탄금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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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강물에 혼을 묻다 탄금대는충주시칠금동에소재한구릉지인대문산의산정(山頂)으로, 기암절벽을휘감아돌며유유히흐르는남한강과울창한송림으로경치가매우좋은곳입니다. 이곳에는임진왜란때무장신립이 8,000여명의군사를거느리고왜장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와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의군대를맞아격전을치른전적지이기도합니다.

1592년 4월 17일, 경상좌수사박홍이왜군이침략했다는소식을알려왔고급보를접한조선조정에서는경상도지역에서한양으로넘어오는세갈래길을막기위해 시간을 벌어 정예군으로하여금적의주력을괴멸시키려는전략을 세웠습니다. 이정예군을맡은장수가바로신립이었습니다.선조는신립을도순변사로삼아이일의뒤를이어떠나도록했고신립이떠날때선조는친히배웅하면서보검한자루를하사하며말했습니다.

“신립은검을받아라. 내가전권을그대에게위임하니이일이하그누구든지명을어기는 자는모두참하라.” 신립은충성을맹세하며전장을향해출발했습니다. 도성사람들이모두나와신립군의승전을간절히기원하면서환송했으나 왜군의진격은상상을초월할정도로빨랐습니다. 먼저출발한이일이상주에도착했을때그지역의군사들은모두뿔뿔이흩어지고도망가고없었습니다. 경북상주에서이일을무너뜨린왜적은이미문경새재에다다라충주를바라보고있었습니다. 신립은‘문경새재로나가적과접전을벌일것인가,아니면충주에서적을맞이할것인가’라는중요한결단을내려야했습니다. “충주탄금대, 그벌판에서적을맞이할것이다.”

“이곳충주로넘어오는적들과전면전을벌일것이다. 우리가패배한다면한양도없는것이고조선도없는것이다. 내만약죽는다면이곳탄금대에서죽으리라.” 신립은반대를무릅쓰고탄금대에서충주로넘어오는적들과맞붙었고, 신립의돌격명이떨어지자조선군사들은앞으로달려나갔습니다. 후퇴할길은없었으며 뒤로는시퍼런남한강물이굽이치고있을뿐이었습니다. 기를쓰고달려나갔지만조총을든왜적들앞에서신립의군사들은낙엽처럼우수수떨어져나갔습니다.

1592년 4월 28일, 신립과김여물을비롯한수많은조선인들이남한강가탄금대에서목숨을잃었고 신립은후에영의정에추증되었습니다.

-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들리는 곳 신립장군의역사가서린탄금대에는우륵의가야금에대한일화도전해오고있습니다. 552년(신라진흥왕 13) 가야국에서귀화한악사우륵이이곳에서금(琴)을탔다는것에서탄금대라는지명이유래되었습니다.

탄금대에대한기록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충주목고적조에서살펴볼수있습니다. “탄금대는견문산(犬文山)에있다. 푸른벽이낭떠러지여서높이가 20여길이고, 그위에 소나무참나무가울창하여양진명소(楊津溟所)에굽어임하는데우륵이가야금을타던곳이다. 뒷사람들이이에그대를탄금대라이름하였다.”

탄금대가위치한대문산은견문산이라고도불리며, 해발 108m로구릉상태를이루어산전체가펑퍼짐하며경사가거의없습니다. 탄금대는속리산에서발원한달천(㺚川)이북쪽으로흘러들어남한강과합류하는지점의언덕에자리하고있고 탄금대의넓이는 30만3,300㎡(약 91,450평)에달합니다.

1976년 12월 21일에충청북도기념물제4호로지정되어보호되고있으며, 수려한경관으로인하여 1986년 8월에는공원으로조성되어충주시민들의좋은휴식터가되고있습니다.

또한신립의충의심을기리기위해군수김용은이건립하고육당최남선이찬(撰)한탄금대비가있습니다. 1955년에건립된충혼탑과항일시인권태응의감자꽃노래비, 1976년에건립된탄금정등과악성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등이함께있으며 한편,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궁도장, 대흥사등과조각공원및체육공원이조성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