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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

명릉 전경
명릉 향로와 어로
명릉(숙종 인현왕후) 문무석인
명릉 홍살문
명릉(숙종 인현왕후) 능침
명릉(숙종 인현왕후) 망주석
명릉(인원왕후) 능침
명릉(인원왕후) 장명등
명릉(인원왕후) 석양과 석호
  • 능호 : 명릉
  •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 능의 형식 :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된 쌍릉과 단릉
  • 조성시기 : 1701년(숙종 27), 1720년(경종 즉위), 1757년(영조 33)
능의구성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와 어로 양 옆에는 변로를 깔아 놓아 겉으로 봤을 때 4개의 길로 보인다. 비각 안에는 2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표석이고 또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표석이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특히 숙종의 명으로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감소하기 위하여 석물치수를 줄였다. 대표적으로 8각 장명등이 4각 장명등으로 바뀌었다.

능의구성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에 제일 처음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공사할 때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로 공사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이후 1720년(숙종 45)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능을 조성하여 쌍릉의 형식을 이루었다. 명릉을 조성한지 37년이 지난 후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생전에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미리 묻힐 자리를 정하였으나, 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하여 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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