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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
경종(景宗) 이야기
경종(재세 : 1688년 음력 10월 27일(28일) ~ 1724년 음력 8월 25일, 재위 : 1720년 음력 6월 13일 ~ 1724년 음력 8월 25일)은 숙종과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아들로 1688년(숙종 14)에 창덕궁 취선당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태어남으로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인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정권이 교체(남인 정권)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원자로 책봉된 후 1690년(숙종 16)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01년(숙종 27)에는 무고의 옥(인현왕후 저주 사건)으로 어머니 장씨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숙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으며, 1720년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4년 뒤인 1724년(경종 4)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 재위 시절 1721년(경종 1)과 1722년(경종 2)에 두 해에 걸쳐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둘러싸고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라고 한다. 숙종 말기부터 노론과 소론은 치열하게 대립하였던 시기로, 경종 즉위 후 당시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되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1721년(경종 1)에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노론 측은 한 발 더 나아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종을 두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결국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들은 파직 후 유배를 당하였다.(신축옥사) 그 뒤에도 소론 강경파들은 노론의 숙청을 요구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노론측이 세자 시절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고변을 기점으로 노론 4대신을 사사하며 수백 명의 노론파를 제거하게 되었다.(임인옥사)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조정에는 또 한 차례의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된다.
*경종 탄생일 : 『숙종실록』에는 10월 27일(숙종실록 19권, 14년 10월 27일)로, 지문(誌文)과 행장(行狀), 능표석에는 10월 28일로 기록되어 있음.
선의왕후(宣懿王后) 이야기
경종의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재세 : 1705년 음력 10월 29일 ~ 1730년 음력 6월 29일)는 본관이 함종인 함원부원군 어유구와 완릉부부인 이씨의 딸로 1705년(숙종 31)에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18년(숙종 44)에 왕세자빈 심씨(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즉위하자 경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730년(영조 6)에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의왕후가 중전 재임시절 경종이 후사가 없자 종친 중에서 어린 아이를 입양하여 후사를 정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궁중의 일각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721년(경종 1)에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아무리 병약하다고는 하나 즉위 1년 만에 왕세제를 책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론은 소론과의 알력 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세제 책봉 뿐 아니라 대리청청까지 주장하였고, 계속적인 정권싸움과 숙청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의 한 가운데에, 결국 선의왕후의 양자 입양은 무산되었다.